건축학
이탈리아에서의 다양한 실험들.
popcorngirl
2021. 4. 25. 00:12
이탈리아 역시 심각한 주택 부족에 시달렸다. 전쟁 중에 100만 호가 넘는 주택이 파괴되었고, 짧은 기간에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파시즘 독재정권이 주택 문제를 등한시해 버린 것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51년에 시행한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이탈리아는 인구 1,000명당 주택 수가 241호에 불과했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 서독과 네덜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주택 부족에 시달린 국가라는 의미였다. 4 이탈리아의 주택은 질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주택 내부 위생시설의 면적 및 기준의 측면에서도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뒤떨어졌다. 1951년을 기준으로 방 하나당 거주 인구는 1.27명이었는데, 체코, 헝가리, 그리스 등 유럽의 최빈국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했다. 문화국가를 자처하는 이탈리아로서는 치욕에 가까운 수치들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 시행했던 정책은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 공급이었다. 이나 가사 INA-Casa'로 불리는 공공주택 공급정책으로, 이나 INA는 노동 및 사회복지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국립보험공단'stituto Nationals Della Assicurazioni)'을 지칭한다. 그곳에서 공급한 공공주택을 이나 가사'라고도 하는데 편의상 ‘공단주택 公團 住宅’ 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탈리아어로 '가사'는 주택이라는 뜻이다. 1949년에서 1963년까지 지속한 공단주택사업은 자금 조달 방식이 특이했다. 집 없는 근로자의 급료에서 일정 비용을 떼는 동시에 그들을 고용한 사용자의 수익금 중에서도 일부를 차출하여 공단주택 건설자금으로 비축했다.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자금도 활용했다. 도판 8 공단주택사업을 발의한 사람은 다섯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면서 근대 이탈리아 정치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아민 토에 판판이 Amintore Fanfani였다. 이런 이유에서 이 정책은 '판파니 계획 Fanfani Plan’으로 불린다. 그가 제안한 주택정책은 주택 보급과 고용 확대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급증한 실업자를 건설시장에 흡수하고 그들이 받는 임금의 일 부를 주택 건설자금으로 환원시키는 정책이었다. 판판이는 로마 가톨릭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그가 일찍이 몸담았던 파시즘의 조합주의 corporatism' 와도 맥이 닿아 있다. 조 합주의'는 계층을 초월하는 민족적 연대 그리고 공동의 희생과 참여를 표방한다. 노동자와 사 용자 모두가 자금을 부담하는 공단주택사업은 이러한 조합주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주택이 완성되면 추첨을 통해 당첨자를 결정했다. 입주한 노동자는 우선 임대형식으로 집을 사용하고 다 달이 내는 부금의 납부가 완결되는 시점에 비로소 주택을 소유하게 되었다. 공단주택사업을 통해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십사 년간 33만 5,000호의 공공주택을 건설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 공급한 전체 주택 수의 25%에 해당한다. 매주 약 2,800호의 주택을 공급했다는 의미가 된다. 많은 양의 주택을 시급하게 건설하다 보니 상당한 문제 또한 노출됐다. 촘촘하게 밀집된 이탈리아 도시들의 특성상 기존 도시 내부에는 주택을 지을 땅이 없었다. 결국 외곽의 빈 땅에 도심과의 공간적 연계나 교통시설에 대한 고려 업신여기죠 기 닥치는 대로 단지를 조성했다. 장기적인 도시계획과는 상관없이 주택이 건설되었다. 공단주택 단지에 배정받은 서민들은 도시 외곽의 새로운 장소로 이주했으나 일상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주민들은 긴 출퇴근 시간, 생필품 구매의 어려움, 학교나 교회 같은 공공시설의 부재 등 많은 어려움을 겪섰다. 이런 문제들은 십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씩 나아질 수 었다. 공단주택사업은 당연히 근대건축의 언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30년대부터 주세페 테러니 Giuseppe Terragni 같은 걸출한 건축가가 근대건축언어를 선구적으로 제시하면서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1936년 호모 Como 에 완성한 '가사 델 파쇼 Casa del Fascia' 즉 '파시스트의 집’은 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 준다. 6 도판 9 이 건물은 건축가가 이십팔 세의 나이에 설계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비례와 공간구성을 보여 준다. 공단주택 단지 중에서 근대건축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루이지 카를 노 다니리 Lugi Carlo Danes가 계획한 일련의 단지들이다. 제노바 태생인 그는 '이탈리아의 그 코를 뷔지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 코르뷔 지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가 계획한 집합주택들은 강력한 기하학적 역동성과 함께 합리적 경향이 뚜렷했다. 다네리가 처음 시행한 대규모 집합주택 계획은 1934년 제노바의 명소인 거부 리아 광장Piazza Della Vittoria 인근에 계획한 아홉 동의 고층 아파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