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사회주의 국가와 근린지구 이론

popcorngirl 2021. 4. 25. 06:13
소련은 1928년부터 전국에 200개의 공업 도시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서구 건축가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1931년 르코르뷔지에가 참여한 '소비에트 인민궁전 Palace of Soviet' 현상설계의 당선작이 신고전주의 경향의 작품으로 결정되자 그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또한 이후 소련의 분위기가 급속히 변화하면서 모든 계획이 근대보다는 신고전주의적 경향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회의는 무산되었고, 1933년 마르세유에서 아테네를 왕복하는 유람선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스탈린 독재체제로 관계가 단절된 후에도 소련과 서구의 건축가들은 새로운 주거환경을 보는 눈에 있어서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소련 건축가들도 위생, 채광, 녹지, 오락 등을 강조했다. 그들 역시 슈퍼블록' 개념을 신봉했으며, 주거 공동체'를 지향했고, 공동취사시설, 공동육아시설 등을 통한 확대된 공동체 이념을 지지했다.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이러한 공동체 이념은 푸리에의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들은 몇몇 주거지역에서 이러한 공동체 모델을 시도했으나, 별로 호응이 없자 전국으로 확대하지는 않았다. 결국 가족 체제는 유지하되 주거지에 대규모 공동시설을 제공하는 절충적인 방안을 시행했다. 생산의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공산당에서는 가사노동과 육아의 부담을 줄여서 여자에게도 남자 와 동등한 노동력을 보장해 주려고 했다. 유럽의 사회주의자와 미국의 남녀 평등주의자가 추구한 '동등의 사회'는 이념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소련은 기능주의로 향했다. 새로운 지도자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추구한 상징주의 건축을 폐기할 것을 선언했다. 동시에 건설기술을 현대화하고, 건축유형을 표준화하고, 대량생산을 위해서 자유 패우 공법을 도입할 것 등을 요구했다. 나아가서 국가건설사업의 제일 목표를 인민을 위한 주택 건설에 둘 것을 천명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서 소련과 동구 권의 건축가들은 기능주의를 표방한 건물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흐루쇼프가 새로운 거 성지 채를 시행한 것은 해묵은 이념보다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용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제이차세계대전이 종결된 시점에서 소련을 위시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심각한 주택부 족에 시달렸다. 이른 시일에 많은 양의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건축가들이 제시한 방법을 수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과거로부터 크게 선회한 소련의 노선은 1989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공산국가들에서 시행한 주택 건설 수법은 한결같았다. 도시 외곽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모든 주택의 공급과 소유의 주체인 국가에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들은 싼값에 많은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서 자유 패우 공법을 사용했다. 건물 형태는 되도록 단순하게 했으며, 전국적으로 한두 종류의 표준설계만 사용했다. 그 결과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자유 패우 공법을 사용한 단지 건설은 그 양이 실로 엄청났다. 예를 들면 폴란드에서만 400만 세대의 인구가 이렇게 건설된 대규모 주거단지에 거주했는데 도시 거주자의 삼 분의 이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도판 13 1999년 사이에 폴란드에서 건설된 주택의 60%가 자유 패우 콘크리트로 지은 주택이었다. 10 공산국가에서 건설된 대규모 주거단지는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유사한 사례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 오늘날 서유럽의 주요 대도시에서는 전체 주택의 3~7% 정도만 2,500세대가 넘는 대형 단지를 이룬다. 1970년 이후 대형 단지의 건설이 꾸준히 줄어든 결과다. 그런데 동유럽 국가의 도시들에서는 40~50%의 주택이 2,500세대가 넘는 대형 단지를 이룬다. 11 도시 인구의 절반 정도가 대형 단지에 거주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대형 주거단지는 과거 국가가 취한 중앙집권화와 통합적 의사결정체계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했다. 전체주의 체제의 중앙정부는 각 도시의 인구 규모에 따라 건설할 주택의 호수를 할당했고, 각 도시에서는 물량 그대로 차질없이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고유의 전통과 요구는 무시되었고, 지자체에서 대지를 정하는 즉시 정부의 임무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형 단지가 많이 건설된 저변에는 그들이 설정한 근린지구 이론이 자리한다. 미크로라서요 Mikrorayon’으로 불리는 그들 나름의 근린지구는 페리의 이론에 바탕을 두지만 이념이 깔린 일종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근린지구의 중심에 초등학교를 둔 것은 페리의 개념과 같다. 그런데 근린의 크기는 최소 인구 5,000명에서 최대 1만 5,000명까지를 수용하는 대형 크기다. 미크로라서요 이 위계적으로 구성되면 최종적으로 인구 10만 명이 넘는 도시 규모의 주거지를 이룬다. 이런 주거지에는 적절한 규모의 서비스 시설이 제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상점, 학교, 운동장, 도서관, 병원 등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기준이 설정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기준대로 서비스 시설이 제공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이런 대형 주거지는 베드타운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곳에서는 커뮤니티 의식이 모자란 데 따른 파괴, 범죄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